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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방 (14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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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지방(1466년)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466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여 1536년 파직된 후 생을 마감했다. 148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연산군 치세에는 팔도를 순회하며 밀명을 수행했다. 중종 반정 이후에는 북방 지역의 방어와 야인 토벌에 힘썼으며,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여러 차례 탄핵과 파직을 겪었으나, 청렴한 관리로서 지방관과 군직을 두루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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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방 (146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글 이름이지방
한자 이름李之芳
로마자 표기I Jibang
한글 이름 (짧게)이지방
다른 뜻이지방
출생일1466년 10월 15일
출생지조선 강원도 강릉부
사망일1537년 12월 11일
사망지조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언주리 헌릉인근
사망 원인병사(풍증, 이질, 소갈 등)
거주지조선 강원도 강릉부
함경북도 종성군, 의주군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
평안북도 의주군
한성부
평안북도 의주군
한성부
황해도 수안군
충청도 공주군 남포현(현, 보령시 남포면)
조선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언주리 헌릉인근(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내곡동)
국적조선
국가조선
별명자(字)는 자화(子華), 호는 미상
학력1489년(성종 20년) 무과 급제
직업무신, 정치인, 군인, 외교관
직책무신, 정치인, 군인, 외교관
종교유교 (성리학)
배우자청송심씨
자녀아들 이광식, 딸 이씨, 딸 이씨
부모아버지 이징, 어머니 양천허씨
친척동생 이지영
조카 이형손
매부 정현조
이오
당숙 이수형
사돈 정인지
사돈 정숭조
사돈 윤지임
사돈 윤원형
윤원로
생애1466년 10월 15일 ~ 1537년 12월 11일
별명자는 자화(子華), 호는 미상
태어난 곳조선 강원도 강릉부
죽은 곳조선
복무조선
복무 기간1489년 ~ 1531년
최종 계급병마절도사
근무조선 육군, 수군
지휘경상좌수영
전라우수영
함경남도병영
평안도병영
충청도병영
주요 참전 전투/전쟁1491년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군관(軍官)으로 출정
기타 이력1489년(성종 20년) 무과(武科)에 급제

2. 생애

이지방은 1517년 문정왕후의 책봉 주청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 겸 왕비 책봉 주청사, 종계변무사가 되어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다.[1] 그러나 종계변무는 허락받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왕비 책봉 승인만 받아왔다. 1518년 4월 북경을 방문한 정조사 이지방은 《대명회통》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져왔다.[6] 그가 구입해 온 《대명회통》에는 '태조가 이인임의 후예로 고려의 네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양국 간의 중요한 외교 현안이 되었다.[6]

1518년 말, 이지방은 방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파직되었다. 당시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겉으로는 조선을 섬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야인 부락들과 결탁하여 갑산부를 침범, 사람과 가축을 잡아갔다. 변장(邊將)이 체포하려 하자 속고내는 이름을 바꾸고 남도(南道)에 출몰하였다. 병사(兵使)가 군대를 내어 불시에 체포하기를 청하니, 중종이 삼공 및 지변 재상(知邊宰相)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모두 징계를 주장하여 이지방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또한 본도에 비밀리에 군사와 무기를 보내어 불시에 체포하게 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상은 선정전에 나아가 이지방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궁시(弓矢)와 갑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가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아니다."라며 반대하자, 상은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고 보내지 않았다.[78] 유담년 등이 반대하였으나, 상은 끝내 이지방이 가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78]

15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재직할 당시 삼둔(三屯)의 야인(野人)을 구축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사간원의금부에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더욱이 1524년 1월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병력을 잃은 것을 지적받아 언관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 해 다시 복직하였으나, 1528년 명나라 효렬숙황후 진씨(陳氏)가 죽자 진위사(陳慰使) 이팽(李芃)과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명나라로 향하던 중 국경 지대인 행산역(杏山驛)에서 병이 발병하여 의주목사에게 보고한 후 귀국하였으나, 무단으로 돌아온 죄로 남포에 유배되었다.

1529년 3월 그의 아내가 상소를 올려 유배지를 변경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같은 달 그는 이질(赤痢)과 소갈증(消渴症) 등의 지병으로 귀환한 것이 밝혀지면서 석방된 후, 1531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2. 1. 생애 초반

1489년 무과에 급제한 후, 1490년부터 1493년까지 이계동의 부관으로 평안북도함경북도 지역에서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였다.[1] 1496년 신승선의 추천으로 서정군 장수로 임명되어 종성과 회녕 부사를 역임하였다.

1509년 어머니 양천 허씨 상을 당해 사직하였으나, 상중에 살인을 저질러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3][4] 이후 의주목사를 거쳐 151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2. 1. 1. 출생과 가계

이지방(李之芳)은 1466년(세조 12) 10월 15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소위장군 행충좌위부사정과 호군을 지낸 이경연(李景衍)이고, 아버지는 선무랑 목청전직, 충찬위를 역임한 이징(李徵)이며, 어머니는 사헌부장령, 의정부사인을 지낸 허적(許迪)의 딸 양천 허씨이다.

5대조는 고려 말 밀직부사와 강계원수를 지낸 이의(李山+疑 또는 李草+疑)이고, 고조부 이만(李蔓)은 고려말 홍로부사, 인진사를 거쳐 중추원부사를 지냈는데 조선 건국 후 봉렬대부 호분위경력, 검찰부사로 내려갔다.

동생은 이지영(李之英)인데 이름만 전하고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이지영의 아들 이형손(李亨遜) 역시 무과에 급제하여 가산군수(嘉山郡守)를 지냈으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그의 누이 중 한 명은 정인지(鄭麟趾)의 아들인 하성위 정현조(鄭顯祖)의 후처가 되었고[7], 다른 누이는 이오와 조효돈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부인은 봉사 심안신(沈安信)의 딸 청송 심씨이다. 처조부는 망세당 심선(忘世堂 沈璿)이고, 처증조는 인수부윤 양혜공 심석준(沈石雋)이며, 심온, 심정의 형 인수부윤 심징의 5대손이다. 친정어머니는 고성이씨로 주부 이희진의 딸이며, 직보문각 이운로(李云老)의 증손녀이다. 그의 딸 중 한 명은 윤사흔의 4대손이자 윤지임의 5촌 조카인 윤확에게 출가했고, 손녀딸 한 명은 윤지임의 손자이자 윤원개의 아들 윤강(尹綱)에게 출가했다.

당숙 이수형(李秀亨)은 세조의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으나, 그는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당시 내시로 있던 친척도 있었다고 한다.

2. 1. 2. 초기 관직 생활과 변방 도적 토벌

1489년(조선 성종 2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쳤다. 1491년(성종 22) 11월 여진족 토벌 당시 북정군부원수(北征軍副元帥)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으로 출정하여 승전하였다.

경성(鏡城)에서 벌어진 여진족과의 교전에서 장군 육한(陸閑)이 포위되자, 정은부(鄭殷富)·구현휘(具賢輝) 등 10여 명과 함께 활을 쏴 육한을 구출하였다. 이지방이 쏜 화살이 한 도적의 어깨를 맞혔는데, 도적이 스스로 화살을 뽑아 버렸으나 싸움이 끝난 후 이계동이 그 화살을 줍자 살대에 손가락만한 살점이 묻어 있었다고 한다.[8] 이 전투에서 이지방은 여진족 수급 5구를 베는 공을 세웠다. 1495년(연산군 1) 3월 27일 연산군의 밀부(密府)를 받고 팔도를 순회하였다.

1496년(연산군 2) 무사(武士) 장정(張珽)·이원종(李元宗)·이윤종(李允宗)·유담년(柳聃年), 문신(文臣) 유순정(柳順汀) 등과 함께 서정군장수(西征軍將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17일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으로부터 서정군 장수 적임자 중 한 명으로 천거되었다. 1497년(연산군 3) 5월 여진에 귀화인 출신 선위사 동청례(童淸禮)를 파견할 때 군관으로 동행하여 5월 28일 여진을 다녀왔다. 1498년(연산군 4) 선전관이 되었다. 1499년 9월 4일 정체불명의 여진족 도적이 산양회 친라올(山羊會親羅兀)을 습격하여 1백여 명을 납치하자, 양세영(楊世英)과 함께 추격하여 교전, 도적 한 명의 목을 베었다.[9]

1503년(연산군 9년) 1월 훈련원부정(訓鍊院副正)으로 경연시강관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하였다. 1월 7일에는 평안도함경도에 매년 겨울 목책(木柵)을 설치했으나, 계속된 벌목으로 숲에서 큰 나무가 사라지고 타 지역에서 목재를 운반해야 하는 문제와 백성들의 생계 문제를 지적하였다. 그는 순서대로 번갈아 목재 운반을 담당하게 하고, 매년 2월 초부터 3월 말, 9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장기간에 걸쳐 목책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10]

1503년 1월 28일 변방에 오가작통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을 지적하며, 5가 혹은 10가를 1통으로 하고 각 통에 통장이나 호수를 두는 제도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11]

2. 1. 3. 지방관 생활

1504년(연산군 10년) 5월 27일 종성부사(鍾城府使)로 부임하고[12], 종성진관병마첨절제사를 겸직했다. 얼마 뒤 회령부사 겸 회령진관 병마첨절제사로 전보 발령되었다. 1505년(연산군 11년) 7월 6일에는 연산군의 내관과 족친이라는 이유로 파직당했다.[13]

1509년(중종 4) 1월 29일 회령부사 겸 회령진관 병마절제사로 있던 중, 어머니 양천허씨의 3년상을 당하여, 그해 2월 2일 좌찬성 함경도도체찰사 송질(宋軼)에게 보고하고 사직하였다.[14] 그러나 1511년(중종 6) 9월 3년상 상중에 반인(伴人)을 타살했다가[15] 양사로부터 탄핵당하고 파직, 의금부에 투옥당했다. 그해 9월 25일 의금부에서 삭탈관직과 (杖) 1백대에 도형(徒刑) 3년으로 구형하자, 중종이 보석금으로 속(贖)하게 했다.[16]

1513년(중종 8년) 서용의 명령이 내려졌고, 양사의 거듭된 반대에도 복관되었다. 3월 6일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부임하였으나, 양사에서 거듭 논핵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무렵까지도 상중에 살인한 이유로 사헌부사간원의 탄핵을 여러 차례 받았다. 1516년(중종 11년) 1월 25일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였다.[20] 그해 7월 호우와 태풍으로 포구와 병선 24척이 파손되어, 포구와 병선을 수선, 복구하였다.

1516년 9월 13일 장수로서의 적임자이며 서로(西路)를 잘 안다는 이유로 정광필의 천거를 받고[22], 곧 상경, 9월 21일 동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경상좌수사로 재직 중 백성에게 매월, 동물의 모피(皮物) 1장씩 징수한 것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경차관이 서면추고하게 했다.[23] 같은 해 평안도관찰사 안윤덕(安潤德)의 차사원(差使員)이 되어 의주성을 개보수하였다.

2. 2. 관료 생활

1517년, 중종이 장경왕후 사후 문정왕후 윤씨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이지방은 왕비 책봉 주청사(冊封奏請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1] 당시 조선은 왕과 왕비, 왕세자의 책봉을 명나라에 의뢰했다.

15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된 이지방은 북방 삼경의 기마민족 이주 방지를 건의했으나, 사헌부사간원의 공격으로 파직되어 웅례음부(廐隷陰部)에서 유배되었다. 같은 해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다.

1528년 명나라 소제황후 사망으로 조선 정부 조문 사절단 부사(副使)인 진향사(進香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나, 도중 병으로 국경 지역에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심한 비판을 받고 웅례음부, 황해도 남포로 유배되었다.[1]

이후 이질, 갈증, 당뇨병 증세로 사직을 원했고, 1531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2]

1509년 어머니상으로 사직했으나, 모친상 관련 논쟁에 휘말려 살인 혐의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3][4] 151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517년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18년 여진족 속고내(速古乃)의 갑산부 침략 때 중종의 밀명을 받았으나, 조광조의 반대로 회군했다. 1524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재직 중 삼둔(三屯)의 야인(野人) 구축을 제안했다가 사간원의금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같은 해 1월 여진족 교전에서 병력을 잃은 책임으로 언관들의 공격을 받았으나 복직했다. 1528년 명나라 효렬숙황후 사망으로 진위사(陳慰使) 이팽(李芃)과 진향사로 명나라로 가던 중 병으로 귀국하여 남포에 유배되었다.

1529년 아내의 상소와 지병(이질, 소갈증)이 참작되어 석방되었고, 1531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2. 2. 1. 명나라 파견과 대명회통

1517년 문정왕후의 책봉 주청사(奏請使)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이지방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정조사(正朝使) 겸 왕비 책봉 주청사,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가 되어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1] 그러나 종계변무는 허락받지 못하고, 문정왕후의 왕비 책봉 승인만 받아왔다.

1518년 4월 북경을 방문한 정조사(正朝使) 이지방은 《대명회전》을 구입하여 조선으로 가져왔다.[6] 4월 4일 문정왕후의 조선 왕비 책봉 승인을 받고 귀국하면서, 《정덕회전(正德會典)》을 북경에서 구입하여 조선 국내로 반입했다.

그런데 그가 구입해 온 《대명회전》에는 '조선태조이인임(李仁任)의 후예로 고려의 네 왕을 살해(弑害)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양국 간의 중요한 외교 현안이 되었다.[6] 조선 정부는 《대명회전》의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종계변무(宗系辨誣)’라 불리는 조선의 외교활동은 1588년(선조 21)에 조선의 요구가 반영된 만력본(萬曆本) 《대명회전》을 가지고 종묘에 고유제(告由祭)를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다.[6] 그는 소문으로만 돌던 대명회통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70년 동안 총 16차에 걸쳐 대명회전의 수정을 요청했는데, 명나라가 가정본(嘉靖本)과 만력본 《대명회전》을 편찬할 때마다 사신을 파견하여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다.[6] 그해 4월 4일 북경을 출발, 귀국하였다.[24]

2. 2. 2. 여진족 토벌과 의주읍성 축성

1518년(중종 12) 회령성(會寧城) 밑에 있는 야인 속고내(束古乃)가 몰래 먼 곳에 있는 야인들과 함께 갑산부(甲山府) 경계에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27] 1512년에도 갑산부를 약탈하여 조선 조정은 황형(黃衡)을 파견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했다.[28]

1519년(중종 14) 함경남도병마절도사 겸 북청도호부사로 부임하고, 그해 2월 25일 여연(閭延) 근처에 몰려와 생활하는 김거응구내(金巨應九乃) 등 야인 20여 호를 국경 밖으로 쫓아낼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동의를 얻었다.[34]

1520년 의주성의 대대적인 개축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어 평안도 차사원이 되어 의주읍성곽을 개보수하고 돌아왔다. 1522년(중종 17) 4월 무너진 의주성곽 복구, 중건공사를 수행하다가 현지에서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계속 의주성의 중건을 청하였다가, 양사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1523년 3월 허물어진 의주성의 복구를 청하여 승인받았다. 곧 의주성 복구에 착수하였으나, 복구 인원이 오지 않거나 도주하여 그해 3월 20일 조선 조정에서 파견한 신공제(申公濟), 공서린(孔瑞麟) 등에게 복구 인원 동원의 어려움을 청하였다.[41]

2. 2. 3. 투옥과 석방, 그리고 복직

1523년(중종 18년) 12월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왕명을 받고 여연(閭延)의 야인을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51] 그러나 병력 부족으로 원정 중단 논의가 있었다. 중종은 비변사 낭관 심사손(沈思遜)을 통해 이지방에게 군사를 지원하고, 작전을 돕게 했다.[46]

1524년 1월 9일 허공교(虛空橋)에서 여진족과 교전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1월 12일 부하 이함(李菡)이 여진족 기병에게 기습 공격을 당해 피해를 입었다.[54] 이 전투에서 패배하고, 야인 추격(追擊)을 피해 지름길로 퇴각한 일로 1월 29일 우의정 권균(權鈞)의 탄핵을 받았다.[56] 사헌부에서도 주장(主將)으로서 군사와 말이 많이 다치게 했다 하여 탄핵했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57]

2월 3일 세 부락의 야인을 쫓아내지 못하고 지름길로 퇴각했다 하여 사헌부사간원이 추고를 청했으나, 중종은 적변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온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58] 2월 4일 중종은 세 부락을 쫓은 뒤에 추고하게 했다.[59]

2월 7일 야인에게 잡혀갔던 조선 병사 2명이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 감금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이지방은 기병을 이끌고 가 야인 5인을 사살하고 이들을 구출했다.[60]

2월 12일 부하들을 시켜 파탕동·고도동(古道洞), 여둔동(餘屯洞) 두 부락을 공격하여 야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빼앗겼던 물건들을 되찾았다.[61] 이 과정에서 이지방은 직접 야인 4명을 사로잡았으나, 이송 중 3명이 도주했다.[62]

2월 26일 승전으로 논상이 정해졌으나, 대장이 잘못한 일을 문책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경차관(敬差官)이 파견되어 조사를 받았다.[63] 2월 29일 의금부에서 추고해야 한다는 청이 있었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64]

1524년 (중종 19년) 3월 3일 대간이 세 위(衛)가 싸움에 패한 것과, 지름길로 돌아온 일, 병사들이 동상(凍傷)을 입은 것을 이유로 탄핵했으나 중종이 듣지 않았다.[65] 3월 19일 의금부에 투옥되어 추국을 받았으나, 4월 9일 투옥은 과하다는 왕명으로 풀려나 벼슬만 면직되었고,[66] 7월 8일 왕명으로 복직되었다.

2. 3. 생애 후반

1528년(중종 23) 동지중추부사로서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고, 함경남도평안도의 야인, 도적 토벌을 논의하였다.[71] 함경북도 온성군에 야인이 쳐들어와 사람과 말을 약탈해간 일도 의논하였다. 3월 경연 특진관이 되었다.

1528년(중종 23) 4월 5일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4월 21일에는 양계(함경도, 평안도)의 백성들이 흉년과 추위로 야인의 집에 가서 품팔이와 숙식을 의지하는 것을 들어 남녀 간 혼인도 가능함을 언급하며, 대비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양계 백성들과 피인(彼人, 야인) 사이에 왕래를 우려하였다.[72]

같은 해 7월 황해도에서 도적을 신고하고 상을 받은 윤세필(尹世弼)이 도적에게 보복으로 활을 맞자, 포도청 우포도장에 임명되어 좌포도장 심순경(沈順徑)과 같이 황해도 배천으로 파견되었다. 돌아온 뒤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비변사 당상이 되었다. 1528년 9월 26일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심정, 우참찬 손중돈(孫仲暾) 등과 함께 입시하여 변방의 야인 정벌 시기를 논의하였다. 11월 특진관으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528년 10월, 명나라 효결숙황후 진씨(孝潔肅皇后 陳氏)가 죽자, 12월 27일 진위사(陳慰使) 이봉(李芃)과 함께 진향사(進香使)로 임명되어 명나라로 가던 도중 압록강변에서 발병, 행산역(杏山驛)에 남아 있다가, 의주목사에게 통보하고 1529년 4월 16일 되돌아왔다. 이때 평안도관찰사가 보고하여 중종이 그의 귀환을 허용하였다.

1529년 4월 17일부터 사헌부사간원에서는 그의 귀국을 허용하지 말라고 탄핵하였다. 이후 대간과 사헌부에서 거듭 그의 귀국 허용 취소를 상주하였으나, 중종은 듣지 않았다. 귀국 이후, 5월 25일 사헌부에서 함부로 되돌아왔다는 이유로 처벌을 상소하였다.[74] 5월 27일 의금부에서 대국(大國, 명나라)을 섬기는 예를 행함에 있어 무단히 돌아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장 1백대에 유(流) 2천리에 파면이 내려졌다. 그러나 속(贖, 죄를 용서받는 대가)으로 장 1백대는 면하고 고신(告身, 관직 임명장)을 전부 박탈당하고 황해남도 수안군(遂安)에 유배되었다.

2. 3. 1. 최후

1530년(중종 25) 3월 며느리 함안 이씨가 상소를 올려 시아버지 이지방에게 지병인 풍증(風症)과 소갈병이 있고 이질(痢疾)에 걸린 것과, 아들인 이광식(李光軾)은 원지에 외직으로 부임해 있어 봉양할 수 없음을 들어,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여 다시 충청도 공주목 남포현(현, 보령시 남포면)으로 이배되었다.[3] 병으로 돌아온 것이 인정되어 1530년(중종 25년) 3월 14일 왕명으로 석방되었다.[3] 풀려나온 뒤 1531년(중종 26년) 7월 26일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7월 27일 그가 병으로 부임할 수 없음을 들어, 대간이 체직을 청하여 8월 7일 체직되었다. 그 뒤 동지돈녕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이 되었다.

1536년(중종 31년) 6월 7일 공회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3. 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이경연(李景衍)경행(景行)이라고도 함
할머니의령 남씨남숙문(南叔文)의 딸, 남을진의 증손녀
아버지이징(李徵)
어머니양천 허씨? - 1509년 1월 29일
누이우계 이씨(羽溪李氏)정현조(鄭顯祖)의 계비
누이우계 이씨(羽溪李氏)이오(李晤)에게 출가
외조카이사종(李嗣宗)
동생이지영(李之英)
제수성주 이씨(星州李氏)친정아버지 이름 미상
부인정부인 청송 심씨(淸松沈氏)1469년 11월 19일 ~ 1540년 10월 19일
우계 이씨(羽溪李氏)
사위변안(邊晏)원주 변씨
아들이광식(李光軾)1493년 9월 29일 ~ 1563년 12월 1일
자부함안 이씨(咸安李氏)1492년 12월 1일 ~ 1536년 10월 7일, 정국공신 평안도관찰사 이세응(李世應)의 딸
손자이계변(李繼邊)요절
손자이감(李戡)1516년 10월 27일 ~ 1583년, 송곡 이서우의 고조부
손부풍천 임씨(豊川任氏)1515년 4월 12일 - 1556년 2월 1일, 정헌공 임권(任權)의 딸, 소간공 임유겸(任由謙)의 손녀
손부예천 윤씨(醴泉尹氏)1538년 10월 28일 - 1624년 11월 11일, 윤연수(尹延壽)의 딸, 예산 윤씨(禮山尹氏)라고도 함
손자이전(李晉+戈)1517년 11월 21일 ~ ?, 충장공 이복남(李福男)의 할아버지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
손녀사위윤강(尹綱)윤지임의 손자, 윤원개의 아들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
손녀사위신경호(申景濩)
손자이용(李庸+戈)1533년 ~ 1591년 1월
손녀우계 이씨(羽溪李氏)1523년 11월 8일 ~ 1568년 4월 1일
손녀사위이춘림(李春林)1518년 3월 3일 ~ 1568년 11월 16일, 진남군 종생(鎭南君 終生)의 차남 진례부정 형(進禮副正 衡) 5대손
우계 이씨(羽溪李氏)
사위윤확(尹確)파평 윤씨, 진사 증지평 윤이손(尹李孫)[77]의 아들
외손자윤위(尹威)
우계 이씨(羽溪李氏)
사위변안(邊晏)원주 변씨, 참봉, 변상복의 증손
외할아버지허적(許迪)양천 허씨, 사인, 사헌부장령 역임
처조부심선(沈璿)? ~ 1467년 9월 20일, 호는 망세당
장인심안신(沈安信)봉사
장모고성 이씨(固城李氏)주부 이희진(李希振)의 딸


4. 평가 및 의의

이지방의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에 있었다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29번지로 이장되었다. 남사고는 그의 묘소가 제왕의 산지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75] 1630년(인조 8) 3월에는 선조의 능을 이장할 장소를 정할 때, 그의 묘소 주변이 후보지로 추천되기도 했다.[76]

1518년 이지방이 방어사로 임명되었다가 곧 파직된 사건이 있었다. 야인(野人) 속고내(速古乃)가 조선을 침범하여 백성과 가축을 납치하자, 조정에서는 이지방을 보내 징벌하려 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에 어긋나는 속임수"라며 반대했다. 조광조는 당당한 조정에서 작은 오랑캐를 상대로 도둑과 같은 계책을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78]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 등은 "병법에는 기발한 방법과 바른 방법이 있고, 적을 막는 데는 상도(常道)와 권도(權道)가 있다"며 이지방 파견을 옹호했지만, 왕은 결국 조광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지방의 파견을 취소했다.[78]

남사고는 이지방의 묘가 제왕의 자리에 적합하다고 평가하여[79], 1600년(선조 33년) 6월 선조의인왕후가 사망했을 때, 그의 묘는 의인왕후의 능 후보지 중 하나로 논의되기도 했다. 1630년(인조 8년) 3월 인조가 선조의 능을 옮기려 할 때에도 그의 묘가 후보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Lee Ji-bang:encykorea http://encykorea.aks[...]
[2] 웹사이트 Lee Ji-bang https://terms.naver.[...]
[3] 웹사이트 中宗実録14巻、中宗6年9月16日癸亥2回目の記事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中宗実録14巻、中宗6年9月30日ジョンチュク3回目の記事 http://sillok.histor[...]
[5] 서적 구묘문(丘墓文) 첨정 이공의 묘갈명 민족문화추진회 1978
[6] 논문 조선시대 國家典禮書의 편찬 양상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7] 문서 정현조의 동생 정숭조의 증손녀와 이길남의 결혼
[8] 간행물 북정 부원수 이계동을 인견하고 북정의 경과 상황을 듣다 성종실록 1491-11-16
[9] 간행물 내수사에서 양곡 무역하는 것을 금하게 하다 연산군일기 1499-09-10
[10] 간행물 경연에 나와 윤대를 받다 연산군일기 1503-01-07
[11] 뉴스 금일(今日) 경향신문 1947-01-28
[12] 간행물 이지방과 김옥견이 감사드리다 연산군일기 1504-05-27
[13] 서적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경인문화사 2006
[14] 간행물 도체찰사 송일이 배사하며 회령 부사의 후임 임명·수령의 부임 재촉을 청하다 중종실록 1509-02-02
[15] 간행물 이지방을 금부에 하옥하다 중종실록 1511-09-16
[16] 간행물 금부가 이지방의 죄를 조율하니 답하다 중종실록 1511-09-25
[17] 간행물 헌부가 이지방의 단죄를 청하니 답하다 중종실록 1511-09-30
[18] 간행물 대사간 안팽수가 겨울 천둥과 얼음이 없는 것으로 형벌과 정치의 해이함을 논하다 중종실록 1511-12-13
[19] 간행물 양사가 이지방 등 서용의 일을 아뢰다 중종실록 1513-03-08
[20] 간행물 신용개·장순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중종실록 1516-01-25
[21] 간행물 박세희·기준 등이 언로를 위해 박상 등을 용서해 줄 것 등을 청하다 중종실록 1516-03-08
[22] 간행물 80세 이상 노인들을 공궤하고, 병조를 명소하여 조병하는 일을 마련하여 아뢰라 하다 중종실록 1516-09-13
[23] 간행물 대간이 잠실과 최항의 일 등을 아뢰다 중종실록 1516-09-26
[24] 간행물 이지방이 경사로부터 돌아오다 중종실록 1518-04-04
[25] 간행물 사정전에 나아가니, 주장합의 일·변장의 선발·한충이 얻어 온 선비의 상소를 아뢰다 중종실록 1518-06-19
[26] 간행물 정광필 등이 빈청에 모여 북도의 주장합의 일을 의논하다 중종실록 1518-07-02
[27] 서적 퇴계문선 두산동아 2010
[28] 간행물 함경도 절도사 정인겸의 계본을 병조 판서 유담년이 아뢰다 중종실록 1518-08-16
[29] 문서 함경남도
[30] 간행물 이지방을 방어사로 내려 보내는 일을 정원에서 합의하여 아뢰다 중종실록 1518-08-16
[31] 서적 조선왕조 500년:12. 조광조의 죽음 금성출판사 2010
[32] 서적 해동잡록 1, 본조 조광조
[33] 뉴스 조광조의 '대외정책' https://news.naver.c[...] 데일리안 200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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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실록 중종실록 152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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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적 입조편년 (立朝編年) 상권, 관직일기 1528
[74] 실록 중종실록 65권, 중종 24년 5월 25일 기미 3번째기사 1529-05-25
[75] 간행물 東洋學硏究 第1輯 원광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5
[76] 실록 인조실록 22권, 1630년(인조 8년, 명 숭정 3년) 3월 18일 무술 2번째기사 1630-03-18
[77] 문서 족보 정보
[78] 서적 국조보감 제19권
[79] 실록 선조실록 127권, 1600년(선조 33년, 명 만력 28년) 7월 26일 정묘 1번째기사 160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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